‘모짜르트 효과 (Mozart effect)’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1993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심리학자 프랜시스 라우셔(Francis Rauscher) 교수팀이 처음 제기했다. 라우셔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아이큐 테스트를 하기 위해 모짜르트의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D장조 k.448」을 들려주었다. 이 음악을 들은 집단이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보다 공간지각능력(spatial reasoning skill)에서 더 높은 점수가 나온 결과, 어릴 적부터 모짜르트 음악을 들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주장했다. 그 뒤로 모짜르트 음악은 영재교육 음악과 치유 음악으로서 널리 알려졌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사진제공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이와 같이 모짜르트의 음악은 어린 상추 잎을 빨리 자라게 하고 어린이의 지능을 향상케 하며,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즉,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외치는 ‘힐링’에 적합한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모짜르트의 음악이 가진 힐링 요소를 보면 첫째, 작품의 성격이다. 그는 대부분의 곡을 장조로 작곡하였으므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모짜르트가 언제나 밝고 행복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모짜르트의 자아가 태양을 품은 아이처럼,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스스로에게 늘 그대로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조로 표현된 그의 슬픔은 더 슬프고 또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현상을 따라서 듣고 있는 사람의 어두운 그늘도 저절로 사라지는 것 같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 클라이넷 콘체르토 가장조 2악장이 있다.
두 번째, 완전하고 자연스럽다. 모짜르트를 천재 음악가로 손꼽는 이유이기도 한 부분이다. 음악학자들은 그가 이미 10세에 하이든의 50세 때의 작곡기법을 보여준다고들 한다.
곡을 만들기 위한 어떤 수고로움조차 없을 것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그는 생이 다하는 날까지 작곡하였다. 실제로 그의 오페라의 주요 멜로디들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오페라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흥얼거릴 만큼 유명했다.

Wolfgang Amadeus Mozart
모짜르트, 천재가 되기 위한 조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1756년 1월 27일 저녁 8시, 아버지 레오폴트 모짜르트(Leopold Mozart; 1719~1787)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Anna Maria) 사이에 일곱째로 태어났다. 위로 여섯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모짜르트보다 다섯 살 위의 누나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애칭 ‘난널’)와 함께 자랐다. 그의 이름에서 아마데우스라는 이름은 ‘신의 은총’을 뜻한다.
모짜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 선생님이며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궁정 부악장으로 일했다. 그가 집필한 바이올린 주법에 관한 저서《Versuch einer grundlichen Violinschule》은 18세기 음악 양식의 연구에 중요한 본보기로 전해지고 있다.
모짜르트의 양친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모짜르트에게 수유하지 않고 물에 꿀을 타서 먹였으며 가끔 곡물을 묽게 끓인 미음을 먹였다.
모짜르트는 곰 인형을 가지고 놀 때에도 피아노 연습하는 누나 난널 곁에서 놀고 싶어 했다. 3살이 되어 피아노 의자를 올라가 마구 건반을 두드리다 3도 화음을 치게 되었는데, 이 음에 아름다움을 느껴 옹알이 같은 가락을 노래했다. 레오폴트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4세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다. 어린아이 모짜르트가 30분 만에 작은 미뉴에트(minuet)를 완벽하게 연주해 내어, 음감과 리듬감은 물론이고 언어감각도 뛰어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집중력이 뛰어나 숫자에 관심이 생기자 온 집안의 바닥을 숫자로 뒤덮었고 4세가 되어 집중해서 악보를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6세 전에 이미 작은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하였다.
모짜르트는 학교 다닌 적이 없는데도 수학과 음악 그리고 독일어ㆍ이탈리아 어ㆍ프랑스 어ㆍ라틴어 등 다국어를 익혔다. 성정이 예민하여 주변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라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를 사랑하시나요?”라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묻곤 하였으나 부모님 말씀을 거스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렇듯 자식에게 영재교육을 한 레오폴트는 엄격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모짜르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신 다음으로 아버지를 사랑한다.”
모짜르트와 연주 여행
천재 모짜르트가 우리나라의 토정비결을 보았다면 아마도 역마살에 도화살이 낀 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칠까? 6세의 생일이 막 지나서 어머니의 품을 떠나 아버지와 누나를 따라 뮌헨으로 첫 연주 여행을 떠나고, 그 뒤로 연주 여행은 그에게 삶이 되어 버렸다.
여행이라 하니, 오늘날의 교통수단을 이용한 낭만 여행을 떠올리겠으나 마차가 전부였다. 하루 40km의 길을 가는 유럽 여행은 강행군 속에서 이루어졌다. 파리ㆍ런던ㆍ네덜란드를 다녀오는 데 3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폭풍우가 거셀지라도 여행은 멈추지 않았으니 어린나이에 불규칙적인 식사와 잠자리에 익숙해져야 했다.
연주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한 도시에서 여러 차례 연주하는 동안 때로는 지역에 도는 전염병에 노출되는 위험도 허다했다.
여섯 살배기에게 연주 여행은 고되고 짜증나는 일이겠으나 몇 날을 마차 타고 새로운 도시로 이동할 때 이 어린아이는 그림 그리고, 작곡 하고, 이동식 하프시코드를 가지고 피아노 연습을 했다. 또한 어린아이답게 장난스럽고 익살스러운 말을 곧잘 하여 그러한 언어유희는 훗날 그의 서신이나 성악곡에 표현된다. 이를테면, 자신의 이름 mozart(모짜르트)를 거꾸로 읽어 trazom(트라촘)이라고 말해서 주위사람을 한바탕 웃게 했다.
유럽의 대도시에서 몇 개월씩 머문 어린 모짜르트는 왕족과 귀족들에게 조금씩 알려지고 금세 유명해졌다. 사람들은 그의 즉흥연주, 작곡, 밝은 성격에 열광했다. 연주 여행으로 수입이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만나거나 음악회를 다니면서 음악적 견문을 넓히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의 작품에서 묻어나는 경쾌함과 유머, 재치가 있으면서 우아한 성품은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이 먹어가는 어린아이는 더 이상 ‘어린 천재 소년’이 될 수 없어, 이제는 한곳에 머물러 안정된 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귀족의 궁정악장으로서 있고자 하였으나 그의 자유분방함은 방해 요소가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는 유랑자처럼 떠돌며 연주하는 사람을 황실의 궁정악장으로 두기 어렵다고 밝혔다. 게다가 다른 귀족들의 가문에서도 쉽게 자리 잡을 수 없을뿐더러, 잘츠부르크에서 오르간 주자로 있던 자리를 대주교와 불화가 생겨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발길을 옮겼다.
모짜르트의 사랑, 콘스탄체(Constanze)
Constanze Mozart
1781년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빈으로 향한 모짜르트는 만하임(Mannheim)에서 알게 된 베버 부인을 다시 만나 그녀의 집에 하숙을 부쳤다. 1777년 베버 부인의 둘째 딸인 성악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결심하였으나 아버지 레오폴트가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알로이지아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떠나 버리고 베버 부인은 두 딸과 함께 지냈다. 이때 모짜르트는 갓 열아홉 살 된 셋째 딸 콘스탄체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또다시 그의 아버지와 누나 난널이 극렬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1782년 결혼식을 올렸다.
모짜르트는 오페라가 성공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는 듯했다. 콘스탄체와 결혼 생활하고 작곡에 열정을 다할 수 있었으나 자유분방함은 억제하지 못했다. 스무 살에 결혼한 어린 신부가 남편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과 태어난 아기들을 지켜줄 경제력이었다. 콘스탄체는 모짜르트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가계를 책임져 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되레 더 많이 작곡해서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 것을 꿈꿨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울 때 파티를 즐겼고 모짜르트는 내기 당구를 즐겨 빚을 졌다.
모짜르트 죽음의 의혹과 그의 자녀들
1791년 12월 5일 새벽 1시. 35세 한 음악가의 별똥별이 떨어졌다. 그해 모짜르트는 운명 같은 곡을 썼다. 오페라사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의 하나인 대작 「마술피리」를 완성했고 재벌귀족 프란츠 폰 발제크(Franz von Walsegg)의 청탁으로 그의 부인을 위한 진혼곡을 작곡하는 중이었다.
진혼곡은 미완성으로 남겨진 채, 모짜르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죽음에 관해 많은 소문들이 무성했다. 그 하나는 비밀결사대 프리메이슨이 마술피리로 단체의 비밀을 세상에 알린 모짜르트에게 원한을 품고 암살했다는 설, 다른 하나는 그의 영원한 숙적인 살리에리가 독살했다는 설이다.
또한 소문과는 달리, 현대 의학자들은 아버지 레오폴트의 서신과 모짜르트의 기록을 살핀 결과, 그가 류머티즘열에 동반된 급성관절염으로 죽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모짜르트에게 류머티즘열은 어릴 적 연주 여행에서 몇 번씩 보였던 증상이다. 위생관리가 철저하지 못하고 긴 여행을 하는 어린 모짜르트는 자주 아팠고, 35세가 되어서 다시 발병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마르크스(St. Marxer Fridhof) 모짜르트 묘지
그가 죽은 다음날 슈테판성당에 안치돼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해 장례미사를 올렸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날 저녁, 그의 알몸은 하얀 마포 부대에 넣어져 성마르크스(St. Marxer Fridhof) 묘지에 묻혔다. 삶의 마지막을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악장으로 지냈을 뿐만 아니라, 세기의 음악가로 명망 높은 그의 장례식이 너무 검소하다 못해 비석이라든가 십자가 하나 없이 초라한 무덤이었다.
마리아 테레이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Joseph 2세)가 즉위하자, 먼저 합스부르크왕가가 진 빚을 탕감하기 위해 여러 개혁정책을 펼쳤다. 화려한 장례를 금하는 제도를 두어 요제프 2세 자신도 죽어서 소나무 관을 썼다.
18세기 중기는 흑사병 등 전염병과 의학적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병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 죽어가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요제프 2세는 위생관리를 위해 모든 시신을 알몸인 상태로 하얀 마포 부대에 넣어 한밤중에 묘지로 이송토록 하게하고 유가족들이 성 밖 무덤까지 따르지 말라는 금지령을 내렸다.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장례법을 엄격하게 할 수밖에 없을지라도 모짜르트의 업적과 명예가 세계적으로 숭앙받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할 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모짜르트가 생전에 그를 후원했던 귀족들에게 많은 빚을 져서 장례비용마저 빌려주지 않았고, 그의 음악적 천재성에 감탄하고 후원하는 또 다른 편에는 시기와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아 끝내 마지막이 쓸쓸했다.
모짜르트의 부인 콘스탄체는 그의 묘지를 17년 동안 찾지 않아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몰랐다. 다행히 모짜르트의 친구이며 베토벤의 스승이기도 한 알브레히트베르거의 부인이 묘지를 찾아가 기도하면서 나무를 심어놓았기 때문에 실묘(失墓)를 면할 수 있었다. 1856년에 이르러 모짜르트 묘지에 기념비를 세우고 서거 100주기를 맞아 빈 중앙묘지로 옮겨졌다. 오늘날 모짜르트의 기념비는 중앙묘지의 음악가들의 무덤 중앙에 자리해 있고 첫 무덤이었던 자리에는 대리석 기둥 옆으로 천사가 무덤을 바라보는, 작은 기념비가 있다.
모짜르트에게는 여섯 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모두 죽고 둘째 칼 토마스 모짜르트와 막내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짜르트만 살아있다. 막내는 모짜르트가 사망한 해에 태어났다. 이 두 형제는 음악교육을 받았으나 칼은 북부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공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프란츠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 작곡가와 음악교사로 활동하였으며, 불행하게도 이들에게는 자녀가 없이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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