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슈베르트는 불길같이 타오르는 악상을 창작해 1000곡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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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

 

나뭇잎같이도 얇은 옷깃을 열치고 스며드는 찬 기운은 잎사귀 단풍든 계절이 이만치 다가와 있음을 느끼게 한다. 때가 되면 가고 때가 되면 오는, 침묵하지 않으면 한 열흘 되게 앓을 것만 같은 가을! 꿈꾸는 청년 슈베르트의 작은 음악 살롱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슈베르트의 밤)”를 찾아서 간다.
 
19세기의 비엔나는 클래식 음악이 낭만파 음악으로 발전하는 과도기에 있었다. 모차르트가 완성한 클래식 어법을 괴팍한 성격의 베토벤이 자신만의 아방가르드한 기법을 통해 발전시켜 나갔고, 그의 시도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그 시기에는 새로운 극장이 시설되면서 귀족이나 왕족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되고 코믹한 내용의 오페라들이 사랑받았다.
 
서른한 살 젊은 나이에 요절하기까지 청년 슈베르트(Schubert, Franz Peter)는 불길같이 타오르는 악상을 창작해 1000곡이나 넘게 작곡했다. 열정의 그 악곡들은 별다른 수정을 하지 않고 완성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해 천재 작곡가라 불렸다. 그러나 슈베르트 음악은 시대가 요구하는 음악세계와 거리가 있었고 소심한 성격은 자신의 음악세계를 강렬하게 펼치지 못하는 까닭에 생애 동안 크게 빛을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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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아버지의 엘리트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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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슈베르트 생가 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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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 슈베르트 생가 내부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오후 1시 30분,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일하던 조그만 부엌에서 탄생했다. 열네 명의 자녀 가운데 열두 번째로 태어난 슈베르트였으니,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아기를 낳을 법도 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어 슈베르트는 빈에 이주하여 보조교사로 시작, 능력을 인정받아 교사가 되고 후에 리히텐탈에서 자신의 학교를 설립하여 경영했다.
 
오늘날의 비엔나 누스도르퍼스트라쎄 54번지에 위치한 학교는 큰 운동장이 있는 학교 개념이 아니라, 다세대주택과 같은 곳에 방 두 칸이 딸린 집이자 학교였다. 노동계층의 자녀들이 다니는 이 학교는 옛날 우리나라의 동네 서당에 훈장 선생님이 있는 형태와 같은 것으로, 오전ㆍ오후반 각 100명의 어린아이들이 몰려와 공부하였다.
 
슈베르트가 네 살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근처의 죠일렌가쎄 3번지로 이사하여 더 많은 학생을 가르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빈손으로 비엔나에 와서 작으나마 스스로 학교를 세워 아이들 가르치는 것을 매우 만족하며 살았다.
 
아버지 테오도어는 자녀들에게 가정교육을 엄격히 했다. 어린 슈베르트가 입학하기 전에 공부를 가르쳐서 학교에서 줄곧 1등을  차지할 수 있었고 또 바이올린과 피아노, 성악까지 가르쳤다. 그뿐만 아니라 슈베르트가 노동계급층이 받는 교육보다 훨씬 높은 고등교육을 받기를 바라, 최고 고등교육 기관의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 황실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들어가는 자격인 황실 소년합창단에 뽑히도록 뒷바라지해 주었다.
 
마침내 1804년 일곱 살이 됐을 때 모차르트음악의 숙적인 살리에리(Antonio Salieri) 음악감독 하에 치른 오디션에서 6등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 후, 1808년 황실 소년합창단에 자리가 생겨 소프라노로 입단하면서 기숙사비와 학비를 면제받았다. 그 어마어마한 비엔나의 엘리트 학교에서 양질의 일반교육과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슈베르트는 이 곳에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 준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슈베르트는 1812년 열다섯 살이 되어 어머니 엘리자베스를 여의는 슬픔에 빠지고, 설상가상으로 변성기를 맞아 더 이상 합창단에 설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황실 기숙학교의 규칙상, 이러한 상태에서는 퇴실해야 했지만 일반 과목에서 성적이 월등히 나았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깐. 일반 과목수가 많아지자 작곡에 몰두할 수 없어, 1814년 기숙학교를 나와 시에서 뽑는 보조교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여 아버지의 학교에서 보조교사로 취직했다. 하루 9시간 아이들을 가르치고 외의 시간은 자유롭게 작곡만 할 수 있어 매우 만족했다.
 
창작의 불꽃, 첫사랑
열일곱 살의 젊은 슈베르트는 보조교사를 하면서 어릴 때 세례 받은 리히텐탈 교회의 100주년 미사에서 「미사 바장조」를 초연했다. 이날 연주에서 솔로 소프라노 테레제 그롭을 사랑하게 된다. 뛰어날 만큼의 미모는 아니지만 소녀 테레제의 고운 마음과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해 슈베르트는 자신의 영원한 사랑이라고 마음먹었다. 사흘 뒤 그는 테레제를 위한 「물레 잣는 그레첸」을 작곡하였고, 그 다음해 그 유명한 「마왕」을 비롯해 140곡을 작곡하는 등 창작에 불태웠다.
 
아버지 테오도어는 슈베르트가 작곡가보다 집안의 가업을 잇기 위해 교사가 되기를 원했으나, 슈베르트는 자신의 꿈이 부딪치자 1816년 집을 뛰쳐나와 버리고 새로이 알게 된 귀족 친구 프란츠 쇼버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리고 보조교사 직업을 3년 만에 그만두고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로 들어섰다. 음악적 재능 외의 다른 분야에는 세상눈이 어두웠던 슈베르트는 죽는 날까지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테레제와 행복한 결혼을 꿈꾸었지만 슈베르트가 직업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의 집안에서 완고하게 반대해, 1820년 테레제는 다른 남자에게로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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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불운
인생에서 운이야말로 최고의 능력인 것인가? 인생에서 한 사람의 존재를 움직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교직자 아버지의 세심한 계획에 따라 엘리트 교육을 받은 슈베르트, 학연ㆍ지연을 모두 갖춘 슈베르트, 천재적인 작곡가 슈베르트. 그런 그가 평생 집 한 칸 없이 살다가 요절한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156cm의 왜소한 체구에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먼 그를 친구들은 ‘슈밤멀’이라고 별명 붙였다. 오스트리아에서 나는 버섯의 일종으로, 우리말의 ‘버섯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작은 체구만큼 소심하고 수줍음이 많아 여성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여서 첫사랑 테레제를 떠나보낸 후 못 다한 사랑의 환상을 음악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이러한 슈베르트에게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귀족 프란츠 쇼버였다. 프란츠 쇼버는 시인이고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에 실린 슈베르트의 명가곡 「음악에게」를 작사한 음악가다. ‘비엔나의 카사노바’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가는 그가 첫사랑을 잃고 슬퍼하는 슈베르트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날 밤 슈베르트는 에이즈만큼 무서운 성병인 매독에 걸리고 말았다.
 
페니실린을 계발하지 못한 시대에 매독은 걸렸다하면 불치병이었던 터라, 검열을 받지 않은 매춘부들이 많았는데 종종 매독에 걸려서 심한 고생을 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 중 매독에 걸린 사람들이 꽤 있다. 베토벤이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을 먹었고, 가곡 작곡가 휴고 볼프와 철학자 니체도 매독으로 인해 뇌 손상을 가져왔다.
 
슈베르트는 음악가로는 동시대의 인물인 베토벤을 존경했고 시인으로는 괴테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가 쓴 600곡의 가곡 중 70곡이 괴테의 시로 만들어졌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이 그의 작품을 괴테에게 보냈다. 그러나 괴테의 음악 자문인 젤터(Zelter)가 슈베르트 작품을 먼저 보고서는 괴테의 시에 작곡한 작품이 자신의 작곡보다 더 뛰어난 것에 시기해 괴테에게 전하지 않았다. 슈베르트가 죽고 난 뒤에야 작품을 접한 괴테는 그의 음악적 천재성에 크게 감탄하였다.
 
1822년 슈터이어마르크 음악협회의 명예회원으로 영광스럽게 추대되었을 때 슈베르트는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해 보내어 환답했다. 이 곡이 바로 오늘의 「미완성 교향곡」이다. 교향곡은 원래 4악장이 전형적인 형식인데 슈베르트가 2악장 형식으로 된 교향곡을 보내자, 음악협회에서는 슈베르트가 무엇인가 잘못 보냈다고 생각하고 그 곡을 없애버렸다. 그가 죽은 30년 뒤 ‘미완성 교향곡’은 발견되어 세상에 드러났다.
 
슈베르트를 위한, 슈베르트에 의한 “슈베르티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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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가 친구들과 함께한 작은 음악회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일생 불행하게 살아온 슈베르트에게 최고의 운은 친구의 우정이었을 것이다. 엘리트 학교에서 사귄 부유한 친구들이 슈베르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슈베르트의 음악세계를 크게 평가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지인들 앞에서 새로운 가곡과 실내악 연주하는 기회를 갖게 하였으며, 야유회에서 슈베르트가 작곡한 춤곡에 맞춰 친구들이 춤을 추어주었다.
 
이처럼, 친구들은 작은 음악모임을 열어 함께 즐기면서 기뻐했으며 이를 ‘슈베르티아데’라 일컬었다. 이 음악회에서 슈베르트는 피아노를 담당했고, 그의 가곡은 바리톤 미하엘 포글(Michael Vogl)이 불렀다. 포글은 슈베르트의 가곡을 높이 평가해 그와 오스트리아 전역으로 연주 여행을 하면서 슈베르트의 이름을 알리는 데 힘썼다.
 
슈베르트의 죽음과 사인
1827년 3월 26일 슈베르트가 존경하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났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관을 든 횃불지기 36명의 한 사람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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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중앙묘지내 음악가 묘지의 슈베르트의 묘

슈베르트는 매독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였는데, 베토벤이 죽은 다음해인 1828년 11월 19일 장티푸스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성 요제프교회에서 장례미사를 치른 뒤 마츠라인스토르퍼 묘지에 장지할 예정이었으나, 그의 형이 “슈베르트는 베토벤 곁에 묻히길 원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베토벤과 함께 베링어 묘지에 묻혔으며, 1888년 이 두 거장은 다시 중앙묘지 음악가들의 무덤으로 이장됐다.
 
 
[ 윤보라기자 Bora Y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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