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도 하이든을 존경해 군인들을 보내 그의 장례를 돕게 하다
만우절에 태어난 하이든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27)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남동쪽으로 50km 떨어진 작은 마을 로라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의료기술이 발달하지 않은데다 의료혜택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교회에서 세례식을 올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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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우 하이든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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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하이든, 1732년 4월 1일 세례 받다’라고 로라우 본교회의 기록서에 밝혔지만 하이든은 평생 자신의 생일을 3월 31일이라고 주장했다.
 
하이든의 음악 세계를 말할 때 대표적인 수식어로 익살과 재치 그리고 즉흥을 들 수 있는데, 그가 태어난 날이 바로 만우절이다.
 
경제를 읽을 줄 아는 남자, 하이든
하이든의 아버지는 마차 수리 장인으로 마차에 들어가는 나무 수레바퀴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을 하였다. 이 일은 가구 만드는 목공업보다 조금 단순한 돈벌이여서 가난하였지만 아버지는 가족이 함께 모여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장남으로 태어난 하이든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생계를 잇기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자식 하나라도 배곯지 않게 하려는 부모의 마음을 따라 빈 슈테판성당의 소년합창단으로 보내졌다.
 
가톨릭교회에서 미성은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가장 좋은 목소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1587년 이미 교회는 카스트라토, 즉 거세가수(去勢歌手)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성경의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여자는 교회에서 침묵하라.”는 말씀이 있어, 여성들은 교회 안에서 노래를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자보다 더 높은 음을 내는 어린 남자아이들이 교회에서 합창단을 하면서 음악교육을 받고 식비나 생활비 같은 것을 걱정 없이 살 수 있었다.
 
미성의 소년들은 변성기가 오면 여지없이 쫓겨나야 하는 관례가 있었다. 열일곱 살의 아직 어린 소년이 달랑 세 벌의 셔츠와 낡은 바지 한 벌만 입은 채 홀로 빈에 남겨져, 삶은 고달팠다.
 
부모님은 자식의 처지를 알고 있는데도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 없었으므로 하이든이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는 생계형 음악가의 삶을 택했다. 10년 가까이 거리가수로, 반주자로, 개인 지도자로, 귀족에게 작곡을 해 주는 음악가로 생활하면서 받은 돈으로 삶을 꾸려 나갔다. 또한 당대 최고의 작곡가이자 성악가인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Antonio Porpora)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고 레슨을 도우면서는 생활이 점차 나아졌다.
 
하이든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도움을 준 가발 제조업자 켈러의 첫째 딸인 안나 마리아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둘째 딸 테레제를 사랑하게 되었다. 1756년 그녀는 안타깝게도 수녀원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만다. 그때 하이든은 모르친 백작의 궁정 악장으로 고용되어 편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었으며 친분을 유지해 온 켈러의 뜻에 따라 1760년 11월 26일 빈 슈테판 성당에서 안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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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 슈타트 에스터하지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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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에 벤첼 폰 모르친 백작(Count Wenzel von Morzin)의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고, 하이든은 운 좋게 명망 높은 에스터하지 가문에 궁정 부악장으로 들어갔다. 에스터하지(Esterhazy) 가문은 헝가리의 명문가로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에 공을 세워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성을 받아서 그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재력으로는 오스트리아를 통치한 합스부르크 왕가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가문이었다. 특히 1762년 가문을 물려받은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작은 “왕이 누릴 수 있는 것이면 나도 누릴 수 있다.”라는 그의 어록처럼 화려한 삶을 추구했고, 또한 음악에 대한 사랑이 남달라서 직접 음악을 작곡하는 열정도 보였다. 파리의 베르사유궁을 방문한 뒤로 자신의 여름 별장인 헝가리의 페르툐드(fertőd)성을 증축하였고 성안에 400석 규모의 오페라극장과 인형극장을 지었다. 이 성은 오늘날 헝가리의 베르사유라고 불린다.
 
하이든은 1790년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작이 죽을 때까지 30년간 에스터하지 가문에 봉사하였으며 궁정악장으로서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오페라와 여러 행사에 쓰이는 음악, 교회음악 작곡은 물론이고 오케스트라 지휘 및 연습관리, 단원과 성악가 선발 그리고 성악가 개인지도뿐만 아니라 쳄발로와 함머클라비어 조율까지도 직접 맡아 했다.
 
어렸을 적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하이든은 자기 일에 성실하였으며, 윗사람에게 겸손하고 아랫사람에게 자상했다. 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니콜라우스 공작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4분기제로 받았던 급료 외에 공작 가문에서 생산된 와인과 가축, 곡식, 땔나무 등의 생필품이 지급됐으며 1766년에 장만한 집의 보수 공사비까지 책정하여 받았다.
 
하이든은 바쁜 일상생활 가운데 틈틈이 재테크하는 데 신경 쓴 결과, 1778년 집을 매매한 돈의 절반을 공작의 재정담당 관리자에게 투자해 연이율 5%의 금리를 받았다.
 
1770년 이후 점차 그의 곡이 빈에서뿐만 아니라 런던, 파리에서도 연주되어 마침내 사교계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하이든 자신은 그 소식을 빨리 전해 듣지 못했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은 빈에서 남동쪽으로 60km 떨어져 있어서 마차로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나 걸리는 거리였다. 게다가 겨울이 돼야 한두 달 빈에 머물러 지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지인 중 한 사람이 슈테판성당 뒷골목에 살았던 젊은 음악가 모차르트였다.  “파파 하이든!”이라며 하이든에게 곡을 헌정할 정도로 두 사람은 친분이 두터웠고, 하이든은 레오폴트 모차르트에게 “신께 맹세하건데, 당신의 아들은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라며 모차르트 아버지에게 아들의 천재성을 인정했다.

1779년 하이든은 에스터하지 가문과 계약을 갱신할 때 공작에게 자신의 작품을 출판할 권리를 양수하여, 그는 자신의 곡을 빈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파리에서 출판하여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다.

1790년 니콜라우스 에스터하지 공작의 아들인 안톤 에스터하지가 권력을 물려받았는데,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아버지만큼 있지 않을뿐더러 재정상의 이유로 오케스트라를 해산시켰다. 궁정악장이었던 하이든에게는 후한 연금을 주면서 에스터하지 궁을 계속 지켜주길 바랐다. 하지만 하이든은 세상 속으로 뛰쳐나왔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에스터하지 궁 밖을 나온 하이든은 여러 언어를 여러 나라의 언어를 다양하게 구사할 줄 몰랐지만 그의 음악은 유럽 전역에서 사랑을 받고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았다. 뒤늦게 세상을 알고자 유럽 연주여행을 계획하고 1791년 영국 여행에서 자신이 얼마나 유명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옥스퍼드에서는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왕실에서의 만찬과 여러 파티에 초청받는 등 나날이 바쁘게 보냈다. 그러는 중에도 영국에서 받은 영감을 새로운 작품으로 창조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런던 오케스트라의 큰 규모에 감동해 「런던 교향곡」, 「군대 교향곡」 등 이전의 그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교향곡들을 작곡했으며, 후에 베토벤이 애용했던 브로드웨이 함머클라비어를 만나 스케일이 큰  피아노소나타를 작곡했다.

1795년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하이든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하이든은 다시 궁 안의 삶을 살게 되는 운명을 맞았다. 안톤 에스터하지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가문을 이어받게 되는데, 궁정악장의 자리를 지켜 달라는 제의를 요청받아 결국 30년 이상 봉사해 온 가문에 귀속했다.
 
하이든의 사랑과 여인들
18세기 유럽 귀족들의 내연남ㆍ녀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당시 사람들이 굉장히 문란한 생활을 했다기보다 엄격한 가톨릭 교리 아래 정략결혼을 맺은 결혼생활이 행복할 수 없었음과 신 앞에서 서약한 결혼이란 배우자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영원한 계약이었기 때문에 일생 쇼윈도 부부로서 대외관계를 가지면서 각자 다른 연인을 만났던 것이다.

하이든은 가발 제조업자 켈러의 첫째 딸 안나 마리아와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위대한 남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지 못해 음악에 대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이든이 작곡한 악보를 냄비 받침으로 쓰거나 머리를 말아 올리는 종이로 접어 쓰는 일이 다반사였다.

1779년 47세의 하이든에게 늦사랑이 찾아온다. 열아홉 살의 루이지아 포첼리는 에스터하지 가문에 들어온 성악가로, 그녀는 이미 결혼을 해 바이올리니스트인 남편과 두 살된 아들이 있었다. 이 부부는 악장인 하이든 밑에서 에스터하지 궁의 음악가로 활동했는데 하이든의 사랑을 받으며 수없이 성악 지도를 해주어도 루이지아의 노래는 나아지지 않았다. 하이든은 특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루이지아를 무대 위에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오페라를 수정해야 했다. 기교적인 부분을 단순화하고 곡조를 낮게 옮기는 등 평소 그의 음악성과는 다른 것이었다.

1783년 루이지아가 둘째 아들 안토니오를 순산했을 때 부부는 하이든의 아이라고 믿었지만 정작 하이든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안토니오는 자라면서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워 에스터하지 가문의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봉사하였다.
 하이든은 어려서부터 슈테판성당의 소년합창단을 지내면서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정 없이 살아가는 부인이 빨리 죽어 루이지아 포첼리와 결혼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안나 마리아는 하이든이 죽기 9년 전인 180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미 루이지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뒤였다.
 
하이든의 죽음 그리고 음악
1793년 하이든은 빈의 굼펜도르프에 집을 장만하여 전용 마차로 아이젠슈타트를 오가며 궁정악장 생활을 하였다. 공작이 그에게 많은 업무를 내리지 않아 빈에서도 자신의 작업 활동을 활발히 할 수 있게 되어 1798년, 그의 인생 최고의 대작 「천지창조」를 완성한다. 71세에 공식적으로 작품 활동을 멈추었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많은 음악가와 음악 애호가들이 하이든을 만나기 위해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에는 런던 여행을 하면서 만나 하이든에게서 작곡 수업을 받은 젊은 베토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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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슈타트 베르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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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년 5월 31일, 하이든은 향년 77세의 일기를 마감했다.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하던 때로, 나폴레옹은 하이든의 죽음을 애도하여 군인을 보내 장례를 돕도록 하였다. 처음 하이든은 빈의 훈트슈투어머(Hundsturmer Friedhof)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1932년 에스터하지의 후손들이 그가 평생 일했던 아이젠슈타트로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 교회에 안치되었다.
 
 
[ 윤보라기자 Bora Y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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